2012년 10월 8일 월요일

과학기술, 삶의 부담을 더는가?

과학기술, 삶의 부담을 더는가?

한국연구재단 석학인문강좌

 
과학기술은 분명 우리에게 삶의 풍요와 건강을 선사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질을 높였을까? 현대 사회에서 과학기술의 발전이 개인의 삶과 사회 구조에 심대한 변화의 계기를 제공한다는 것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과학기술의 변화에 수반돼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의 문제는 호기심과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매혹적인 주제가 됐다. 첨단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된 미래의 사회 모습이 소설과 영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후원하고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가 6일 광화문 서울 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렸다. 윤정로 KAIST 사회학 교수는 ‘과학기술은 삶의 질을 높이는가?’라는 주제로 세 번째 강의를 시작했다.

빨래 통에서 세탁기로, 그러나 부담은 더 많아져
▲ 강의를 하고 있는 윤정로 KAIST 교수. ⓒScience Times
학계에서도 과학기술과 사회적 변화 간의 연관성에 대해서 일찍이 관심을 기울여왔다. 기존의 학문적 논의는 주로 산업 조직과 노동, 경제 구조, 정치, 군사, 행정체계 등 공적(公的) 영역에서 나타나는 거시적 변화에 집중돼 있었다.

그러나 과학기술은 이런 거창한 방식의 변화와 함께 사적(私的) 영역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방식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런 일상생활의 변화는 또한 다른 어떤 변화에 못지않은 중대한 사회적 함의를 갖고 있다.

가정생활은 사회 구성원 대다수의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산업화와 함께 우리 가정생활의 모습은 커다란 변화를 겪어 왔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보편화된 옥내 상·하수도와 가스 시설, 전기밥솥, 세탁기, 냉장고, 전자레인지, 컴퓨터 등 다양한 가전제품은 대단한 기술 발전을 보여준다.

여성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켰는가?
“요즘 여자들은 살기 편해졌어. 수도꼭지만 틀면 찬 물, 뜨거운 물 다 나오지, 버튼만 누르면 밥도 되고 요리도 되지, 설거지는 식기세척기 사용하면 되지, 세탁기가 빨래 다해주지, 청소도 진공청소기만 밀고 다니면 되잖아. 로봇 청소기는 가만 놔두기만 해도 척척 청소 해주잖아. 쇼핑도 홈쇼핑 전화 한 통화나 컴퓨터 자판만 두드리면 집까지 배달해 준다니까. 게다가 요즘 남자들은 의식이 바뀌어서, 거리낌 없이 부엌에 들어가 설거지하고 청소 도와주고 기저귀까지 갈아주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여자들이 시간이 남지.” 주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집이나 가정이라는 단어는 보통 따뜻함과 휴식의 공간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집이 가족들의 ‘쉼터’가 되거나 또는 구조기능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축소된 가족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집에서 해야 되는 ‘일’이 수없이 많다. 청소, 빨래, 다리미질, 장보기, 요리, 설거지, 육아, 집안 대소사 챙기기 등 대부분의 가사노동은 여성들이 담당한다.

지난 100여 년간 기술의 발전은 여성을 가사노동의 부담에서 자유롭게 함으로써, 여성의 삶의 질 향상과 사회참여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 통념이다. 서구 사회에서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엽까지 상·하수도와 가스, 전기시설이 갖추어지고, 냉장고, 세탁기, 다리미, 청소기 등 다양한 가전제품이 개발돼 급속히 보급됐다.

주부의 노동시간 오히려 늘어
1974년 UN통계청에서 수석연구원으로 근무했던 조안 바넥(Joann Vanek)은 1926년부터 1966년까지 40년 간 미국에서 취업하지 못한 여성, 즉 전업주부들이 가사노동에 사용한 시간에 거의 변화가 없다는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1924년 52시간이었던 미취업 여성들의 주당 노동시간이 1960년대에는 55시간이 됐다.

이 기간 중 51~56시간의 범위 내에서 움직였는데, 이것은 당시 취업 노동자의 주당 평균 노동시간보다 길었다. 도시와 농촌 주부의 가사노동 시간에 별 차이가 없다는 점도 예상을 뒤엎는 사실이었다.

바넥은 미취업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의 총량은 줄어들지 않았지만, 가사노동의 구성과 특성에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했다. 쇼핑과 가계 관리, 육아에 들어가는 시간은 증가한다. 전 기간에 걸쳐 가장 많은 시간이 들어가는 가사노동은 조리와 설거지인데, 그 양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약간 감소하는 추세를 보인다. 청소에 들어가는 시간은 거의 변화가 없다.

그런데 가장 의외의 분석 결과는 세탁작업에 소요되는 시간이 오히려 늘어났다는 점이었다. 세탁은 가사노동 중에서 가장 육체적으로 힘든 작업으로 여겨졌다.

실내에 수도와 온수 공급시설이 설치되고, 자동 전기세탁기와 전기건조기, 다양한 종류의 세제,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전기다리미, 구김살과 손질이 덜 가는 새로운 섬유 등이 개발됨으로써 세탁 작업이 가장 크게 수월해지고 시간도 덜 들어가게 된 가사노동이라는 통념과 배치되는 결과였다. 그 이유는 세탁물의 양과 세탁 횟수가 증가하였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바넥의 시간사용 분석결과는 학계의 주목을 받았고, 여러 학자들이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 총량에 변화가 없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가사기술의 발전으로 일부의 가사노동이 용이해지고 소요되는 시간도 감소한 것이 사실이다.

이런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각 가정에서 보유한 가전기기의 종류와 가족 구성원들의 시간사용에 대한 정보가 함께 수집된 1997년 호주의 자료를 분석한 연구가 있다. 연구 결과는 부엌에서 사용되는 전자레인지, 냉동고, 식기세척기 등의 가전제품의 보유가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을 줄여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탁은 여전히 여성이 전담하는 일이다. 결혼생활에 있어서 매일 가사노동을 하는 것이 여전히 아내와 어머니 역할과 정체성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1989년 서울에 거주하는 주부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 의하면, 이들은 세탁기 사용이 손 세탁보다 시간이 덜 드는 것은 아니지만, 손 세탁보다 힘이 덜 들고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노동절약적 효과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세탁기의 보급이 주부의 세탁 작업 자체에 들어가는 시간과 노고는 덜어주고 가족원들에게 보다 청결한 의생활을 가능하게 해 준 반면, 세탁물의 양과 세탁 빈도, 작업의 단조로움과 고립감, 다중작업을 증가시켰다. 세탁 관련 가사노동 부담이 오히려 증가됐다고 지적한 연구결과도 있다.


김형근 객원기자 | hgkim54@naver.com

저작권자 2012.10.08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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