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BEST SF작가 10인, 윤이형(3)
단순 존재에서 생각하는 존재로 진화
한국SF를 찾아서 <피의 일요일; 2006년>과 <이스투아 공원에서의 점심; 2009년>은 이미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MMO RPG와 가상사회 커뮤니티 서비스(대표적인 성공사례가 미국의 Second Life다.)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인지라 딱히 과학소설이라 할 것도 없다. 하지만 기본 플롯이 전형적인 디스토피아 SF의 틀에 수렴한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발표 시점에서 몇 년 차이가 나긴 하지만 두 단편은 세계관이나 인물의 성격 그리고 주제의식에서 서로 유사점이 많다. 가장 기본적인 공통점은 둘 다 시스템과 그 부속물로 조련되고 소모되는 개인들 사이의 갈등과 각성 그리고 저항을 다뤘다는 데 있다.
발표 시점에서 몇 년 차이가 나긴 하지만 두 단편은 세계관이나 인물의 성격 그리고 주제의식에서 서로 유사점이 많다. 가장 기본적인 공통점은 둘 다 시스템과 그 부속물로 조련되고 소모되는 개인들 사이의 갈등과 각성 그리고 저항을 다뤘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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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이형의 단편집 <큰 늑대 파랑>, 여기 수록된 작품들 대다수는 과학소설의 범주에 들어간다. ⓒ창비 |
<피의 일요일>에서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에 나오는 캐릭터 중 하나인 언데드 종족의 여성 마법사 ‘피의 일요일’은 자신이 독립된 주체가 아니라 PC 사용자의 손끝에서 놀아나며 수없이 죽었다가 살아나길 반복해야 하는 가상 캐릭터라는 언질을 받는다. 그녀가 끝없이 괴물들을 죽이고 짐승들을 먹어치우며 무기를 사들이는 이유는 더 높은 신분으로 상승해 상위 마법사들과 팀을 이뤄 더 막강한 괴물과 상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컴퓨터 사용자의 흥을 돋워주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사용자가 전원을 내리면 그녀의 의식은 물론이고 실존조차 0으로 돌아간다. 전원이 들어오면 그녀는 이전까지의 기억이 흐려지면서 눈앞의 괴물을 해치우느라 딴 생각할 틈이 없다. 이는 당장 하루하루 먹고살 일에 신경 쓰느라 자신을 에워싼 사회의 정치경제 질서가 어떻게 변화하고 재구축되는지 돌아볼 여력이 없는 우리의 삶에 대한 투영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여주인공 앞에 혁명적인 불온한 사고를 불어넣으려는 인간종족의 여성 ‘마지막마린’이 등장한다. 그녀는 몬스터와 싸워야 하는 게임 캐릭터로서의 본능을 극복하고 괴물에게 등을 보인 채 모니터 방향으로 돌아본다.
| “지금 내겐 보여. 그들의 얼굴이 보여! 그들이 내 얼굴을 보고 있어. 놀라고 당황하고 있어! 그리고 나도 내 얼굴이 보여!” --- <피의 일요일>, 선집 <셋을 위한 왈츠>에 수록, 문학과지성사, 2007년, 125쪽 |
컴퓨터 게임에서 게임 캐릭터는 늘 앞을 보고 있기 때문에 모니터 화면에 뒤통수와 뒷모습만 나온다. 따라서 게임 이용자도 캐릭터의 뒷모습밖에 볼 수 없는데 갑자기 앞모습을 드러내며 괴물의 공격에 무방비로 쓰러지는 마지막마린의 데먼스트레이션은 컴퓨터 바깥의 진짜 인간들에게도 충격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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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이형의 단편집 <셋을 위한 왈츠> ⓒ문학과 지성사 |
<이스투아 공원에서의 점심; 2009년>의 무대는 미국에서 실용화된 지 수년이 지난 온라인 라이프 커뮤니티 ‘Second Life’의 업그레이드판이다. 이 사이버 커뮤니티에는 전 세계인들이 각양각색의 선호하는 아바타 모습을 하고 출입하여 현실과 다름없는 삶을 구가한다.
사교생활은 기본이고 교육과 직장, 심지어 부동산 사업까지 벌어진다. 얼마 전 언론 보도를 보면 Second Life 안에서만 유효한 부부관계나 연인관계가 도를 넘어선 나머지 실제 현실사회의 부부관계가 파경에 이를 만치 악영향을 미쳐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현실과 가상공간의 경계가 갈수록 모호해지는 가운데 사람들이 겪게 되는 정체성 혼란이란 주제는 이제 비단 SF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하지만 동일한 주제를 다루는 윤이형의 단편이 신선할 수 있는 까닭은 사이버 세계와 그곳에 사는 인간군상의 모습을 필요에 따라 이 세계를 드나드는 인간이 아니라 그 가상세계 안에서만 살아가는 버추얼 로봇의 시점에서 그렸기 때문이다. 이는 초인 대신 그를 부러워하는 보통사람의 시선에서 그린 <스카이워커>에서와 마찬가지로 과학소설의 전형적인 관습 틀을 다시 한 번 뒤집은 예다.
<이스투아 공원에서의 점심>과 <피의 일요일>은 가상공간 안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묻는 인간 대신 그러한 인간의 수족으로 온라인 공간 구석구석을 돌며 이벤트 광고를 뿌려대는 버추얼 로봇과 닥치는 대로 괴물을 죽여 전투력 등급을 올리려는 마법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불완전한 자아의 주권 회복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버추얼 로봇과 마법사 ‘피의 일요일’은 가브리엘레 살바토레스(Gabriele Salvatores)가 연출한 SF영화 <니르바나 Nirvana; 1997년>에 나오는 컴퓨터 게임 속의 가상 캐릭터를 떠올리게 한다.
이 영화에서는 게임의 주요 캐릭터가 원래 설계자인 프로그래머에게 자신을 제발 삭제해 달라고 애원한다. 어느새 이 캐릭터는 자신이 실제 인간이 아니라 단지 게임 속의 한 부속물임을 깨닫게 됐던 것이다. 이제 스스로를 별개의 의식을 지닌 독자적인 존재로 각성하게 된 이 캐릭터 입장에서는 게임 이용자의 조이스틱이 움직이는 대로 게임 속에서 무한정 똑같은 도전을 하다 무한정 똑같이 죽어나가는 삶을 무한정 똑같이 반복하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하다.
<피의 일요일>에서 여주인공은 순교하는 선각자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보이는 현실의 이면을 깨닫지 못하지만 <이스투아 공원에서의 점심>에서 주인공 버추얼 로봇은 주인(컴퓨터 사용자)의 일방적인 명령수용 방식에서 벗어나 반쯤 독립된 자유를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다시 말해 전자는 부조리한 사회의 이면을 어렴풋이 눈치 채는 데 그치지만 후자는 부조리한 현실을 시정하려 실천하고 부분적이나마 성공을 거둔다.1)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이 단지 연산기능이 뛰어난 기계덩어리가 아니라 주류사회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 어린 비유이기에 독자들의 폭넓은 공감을 얻듯이, 윤이형이 창조한 사이버 캐릭터들(마법사와 로봇)은 좁은 의미에서는 사회의 비주류에 속하는 사람들, 넓은 의미에서는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의 진정한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채기 힘들 만큼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을 대변한다. 결국 이 두 편의 단편은 기성권력이 내세우는 가치와 권위에 눌려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하고 무엇이 진정으로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지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현대 소시민에 대한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결투>: 도플갱어를 소재로 인간의 소외를 이야기하기
인구의 반수 이상이 자고 나면 본체에서 도플갱어가 분리되는 어느 사회, 정부는 츠츠이 야스타카의 <인구조절구역>에서처럼 인구압을 조절하고 유한한 사회자원(일자리)을 정상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본체와 도플갱어 간의 결투를 종용한다. 전국에 산재한 결투장들 중 한 곳의 진행요원인 여주인공은 몇 번이고 자꾸만 복제현상이 일어나 결투장에 찾아오는 한 젊은 여인을 동정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여인의 복제가 원본을 해치우고 나자 원래 체질상 도플갱어 현상과 무관하던 여주인공 또한 복제를 만들어낼 조짐을 보인다. 현대사회에서의 인간들의 소외를 관찰자 입장에서 바라보던 여주인공 역시 같은 체질로 변이되는 결말은 사회와 고립되어 자아를 온전히 지켜낼 수 있는 사람은 없음을 시사한다.
■ 주요 작품 (연도들은 단편이 처음 게재된 해 기준)
여기에는 과학소설로 볼 수 있는 작품들만 수록했다.
<피의 일요일; 2006년>
<스카이워커; 2008년>
<완전한 항해; 2008년>
<이스투아 공원에서의 점심; 2009년>
<결투; 2011년>
<로즈가든 라이팅 머신; 2011년>
<맘; 2008년>
| 1) 여기서 주인공인 버추얼 로봇은 비즈니스 성과에만 골몰하느라 채찍질 할 줄밖에 모르는 주인으로부터 태업을 통해 인격적인 대우를 쟁취한다. 이러한 용기의 동인은 사랑과 애정을 퍼부을 대상(진짜 인간여성)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이로써 기계적인 반복의 삶에 회의를 느끼게 된 이 버추얼 로봇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는 살 수 없게 된다. 겨우 핫도그 하나면 수족처럼 부려지던 이 로봇은 이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행동의 우선순위에 놓기 시작한다. |
저작권자 2012.10.12 ⓒ ScienceTim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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